훈민정음 해례본 사라진 2장 복원된다… ‘정본’제작 추진
문화재청, 연구용역 공고…“70여년 만에 오류 바로잡을 기회”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의 낙장 첫 부분(왼쪽 사진)과 낙장 마지막 부분(오른쪽 사진 오른쪽 페이지). 현재의 낙장은 1940년 이 책이 발견된 직후 김태준 교수와 이용준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이 훈민정음의 낙장 2장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한글 창제 목적과 제자 원리 등을 담고 있어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평가받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낙장(落張) 2장이 복원된다.
지난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책이 발견된 직후 학문적 고증 없이 필사된 부분이 70여 년 만에 제대로 복원되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기초 학술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거쳐 훈민정음 해례본 정본(定本)을 제작하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정본은 원본에 가까운, 표준이 될 만한 책을 말한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지난달 29일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정본 제작’ 연구용역 입찰을 공고했고, 이를 수행할 연구진이 선정되면 연내에 결과물을 받게 된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안동 진성이씨 이한걸 가문으로부터 기와집 열 채 값에 달하는 비용을 주고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지은 앞쪽 본문 4장과 신하들이 한글의 용례를 자세히 설명한 뒤쪽 해례(解例) 29장으로 구성되는데, 간송이 구입한 책은 발견 당시부터 표지와 본문 앞쪽 2장이 없는 상태였다.
낙장 2장에 대해서는 연산군(재위 1494∼1506)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한다고 하자 일부러 뜯어냈다는 설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각 장 뒷면에 쓰여 있는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를 근거로 18세기 이후 떨어져 나갔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2장은 이한걸의 셋째 아들인 이용준이 자신의 은사인 김태준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 교수와 함께 만든 것이다.
김태준 교수는 훈민정음의 본문인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가 나와 있는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과 훈민정음을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을 바탕으로 내용을 재구성했다. 또 훈민정음 본문 글씨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예에 능했던 이용준이 본문의 뒤쪽 부분을 참고해 썼다.
지난 4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전시돼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하지만 이들이 참고한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급하게 제작돼 오류가 적지 않았다. 한글학자인 최현배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고는 앞쪽 2장은 원본이 아니며, 서문의 마지막 글자가 ‘의’(矣)’가 아니라 ‘이’(耳)라고 지적했다.
이후에도 훈민정음 해례본 2장에 잘못된 점이 많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잇따랐다.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 정우영 동국대 교수 등은 해례본 낙장 복원안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고, 학계에서도 낙장 복원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학계 관계자는 “훈민정음 낙장 복원은 국어학자들의 꿈이었다”며 “관련 연구가 많이 축적됐고 기술이 발달한 만큼 70여 년 만에 오류를 바로잡을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낙장 제작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남아 있다. 권두 서명만 해도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어제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잘못 찍힌 구두점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와 글씨의 집자(集字) 방법도 논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본 제작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낙장 복원 결과는 일단 디지털 파일로 받게 될 것”이라며 “간송미술관이 소유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본문 2장 교체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박상현 기자
글쓴날 : [17-08-04 15:55] 신문관리자기자[news24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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