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님들의 힘으로 밝고 희망찬 사회를 만들어 가는 봉사의 거인들 사단법인 한국부인총본부

한국부인회총본부 회장과 한국여성인력개발센터 회장으로서 역할과 앞으로의 방향은?
한국부인회는 1963년도에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박사님께서 설립한 애국애족단체입니다.
당시 우리는 120만 명의 회원을 모집하였고 전국의 모든 여성이 참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11개 시도지부로 시작하였으나 현재는 17개 시도지부 247개 지회에서 120만명의 회원들이 나라사랑과 여성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저희 법인이 YWCA나 주부교실중앙회 등 우리나라의 우수한 22개의 여성단체가 모여서 그 단체 산하 53개 여성인력개발센터가 모여 법인을 설립하였고 2015년 2월에 제가 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15년 10주년을 맞이하여 여성인력개발센터의 존재감이 많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존재감을 살리기 위해 6월 3일 메르스가 유행하던 때에도 마스크를 쓰고 ‘여성이 먼저 합니다!’라는 구호를 가지고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3천명의 전국 각지의 여성이 모이는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각 53개의 센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생각했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여성인력개발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 인지를 알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센터가 있지만 이런 조직이 이미 잘 되어 있는 우리 센터를 이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감을 살려야 한다’라 생각했고 좋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행안부(행정자치부) 장관님께서 저희들을 초대해 주셨고 장관님과 함께 53개 센터에서 함께 토론회도 열며 우리 여성인력개발센터를 알리는 것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말씀하신 것처럼 취업의 70%,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에서 취업의 70%는 여성취업이라고 생각하고 여성이 취업을 해야한다, 그러나 그동안 질적으로 떨어진 취업을 했었지만 우리 여성인력개발센터 연합에서 1년에 20만명의 여성이 교육을 받는데 모든 교육을 이수한 여성들의 절반정도는 취업에 성공합니다. 또한 취업을 하지 못한 여성들은 재교육 후에 취업을 하수 있게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지난 10주년 때 내세운 것 처럼 우리가 예전에 새마을운동을 통해 단합하고 좋아졌듯이 우리보다 개도국에 있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쪽의 국가와 1센터 1국가 자매결연을 맺으려합니다. 그것을 통해 교육과 파견을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12월 1일 중소기업중앙회 대회의실에서 우리가 국제적으로 가는데 준비해야 할 것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또 계도국 여성들과 함께 할 것에 대하여 포럼도 했습니다.


제 생각은 아프리카, 아시아쪽에 새마을운동이 나가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우리의 시스템을 알려주고 또 활용할 수 있는 여성을 교육시켜 그 나라로 취업할 수 있게 하자. 취업이란 것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예를 들어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워 다른 나라에도 취업할 수 있게 한다면 그 여성들이 외화벌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로벌시대 국익성양이라 봅니다.
이런 일들이 좋은 호감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기에 앞으로 이쪽으로 많은 일을 할 것이고 여성인력개발센터를 확고하게 여성의 취업을 위해서 여성인력개발센터가 이렇게 열심히 활동한다는 것을 향해 가려고 합니다.


 저는 여성운동을 시작하면서, 여성운동이란 한국부인회, 여성인력개발센터연합, 4대악척결범국민운동본부를 2013년도 대통령의 국정과제로 4대악척결을 말씀하셨을 때 제일먼저 나서서 저와 뜻을 함께한 여러 단체와 함께 4대악척결범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상임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먼저 여성운동을 해야 할 것이 바로 4대악척결이다 라고 생각해서 시작하였고 성과가 좋았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지원 없이 우리의 회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장이 되면서 이 활발한 여성운동의 기초를 어디에 둬야 하느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한국부인회전라남도지부 이사장으로 계신 어머니의 추천으로 1980년대 처음으로 들어와 소비자 운동을 먼저 시작하였고 경제적인 기반 없이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원을 받고 운동을 한다면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을 지양하기 위해 내가 먼저 봉사하자 라는 생각으로 내가 먼저 내 주머니를 열어 내도록하자 라는 생각을 모두에게 갖게 하기 위해서는 애국심을 불러일으키자 라고 생각을 하고 태극기달기운동을 하며, 지난 아시안게임 때에는 제 사비 9천만원을 기탁하여 태극기 20만장을 구입해 회원 500명이 태극기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처음에는 판매하는 태극기인줄 알고 많은 분들이 거절하며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직접 운동화를 신고 15일 동안 나가서 “우리는 한국부인회 애국애족단체입니다. 태극기를 무료로 배포 합니다”라고 크게 알리며 태극기를 나누었더니 정말 호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다른 단체와 태극기 나눔에 충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시안게임 출전하는 나라에게 한국과 한국의 태극기를 나누며 우리를 단합하게 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태극기 나눔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나눔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막식 때 객석에서 날리는 수만은 태극기를 보았고 우리는 이런 것이 바로 사회운동, 여성운동이다 라며 보람도 느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저는 옛날에 태어났었다면 유관순열사 같은 독립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6남매인 저희가 학교를 다녀오면 항상 아버지가 오늘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른 형제들보다도 더 신이 나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그 상황을 잘 판단해 행동하였다고 말씀드리면 잘 했다고 칭찬도 해주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기 때문에 다른 어려운 아이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용돈을 모아 어렵고 배고픈 친구들과 배려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봉사정신이 생긴 것 같습니다. 또한 그런 것을 계기로 학교를 다닐 때 학급임원도 하고 그 시절에 있었던 청소년적십자사 운동의 단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고 봉사와 나눔이 적성에도 잘 맡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까지 봉사활동을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애국애족에 관한 일은 제일먼저 앞장서기 때문에 요즘은 제가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있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단체의 리더는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시간 날 때마다 각 17개 시도의 247개 지회 120만의 회원을 결속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또한 많은 금액이 아닌 두부 한모 값의 1000원 기부 운동으로 잃어버린 회원을 찾자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나가니 고령의 옛 회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부인회는 10여 년 간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체는 리더가 내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서지 않는다면 사그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17개시도 247개 지회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청년펀드처럼 나도 여성으로서 나라에 펼쳐지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단체를 이끌어 가며 일체의 활동비나 교통비조차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봉사자지만 직원들은 생활인이고 월급이 나가야하기 때문에 전 직접 뛰고 있습니다.
저는 회장취임 전 회원으로 있을 때 에는 수산물 사업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때도 부인회의 회원이긴 하였으나 처음 가입을 한 후 소비자운동 등 활발히 하던 만큼의 활동은 하지 못했고 살짝 소홀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 사업을 하던 시기 저를 많이 믿어주시고 지지해주셨던 박금순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 제가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시기 박금순 회장님께서 넌 회장을 해야한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이 활동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제가 돈 벌어올께요. 하고 떠난 뒤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출장을 다녀오는데 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때의 부인회는 여러 가지 문제와 법적인 문제까지 있을 때 였습니다. 그때 이사님들이 변함없이 저를 지지하셨고 그래서 2007년도에 제가 부회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12년 회장추대가 결정된 후 저는 사업을 정리하였습니다. 돈에 열망하지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시절 가졌던 생각처럼 유관순 열사와 같은 마음으로 봉사하자며 나누자는 마음과 열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전 꺽이지 않는 향학열에 사업을 하면서도 대학원을 다니며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저를 보며 다른 사람들은 교육계로 꿈이 있는 것도 아닌데 힘들게 공부하는 저를 보며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일을 하고 정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 노력이 지금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라사랑은 열정과 나라를 위한 봉사정신 청렴결백함이 있는 사람, 한번이라도 성공을 해본 사람이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저는 2018년도에 여성단체를 마무리 하고 후배들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전까지 저는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할 것 이고, 대통령께서도 남은임기 마무리 잘 하셔서 훌륭한 여성대통령, 성공적인 여성대통령으로 길이 남을 수 있도록 여성의 입장에서 도움 드리고 싶고 유관순열사 같은 마음으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나라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입니다.


이제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나라와 우리단체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찾고 지금처럼 활동할 것입니다.  또 그동안은 여성만을 위해 교육하고 운동했지만, 대통령께서 청년펀드를 하는 것을 보고 그 청년펀드 또한 어머니들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 저 역시 청년펀드에 가입하였고, 각 지부에서도 어머니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천원 기부를 모아 한국부인회의 이름으로 계속적으로 청년펀드를 가입하며 그 동안의 펀드모집이나 기부금처럼 불분명하게 사용되지 않고 제대로 사용되고 있도록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자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어머니의 마음으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할 것입니다.

글쓴날 : [16-01-05 16:14] 신문관리자기자[news24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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