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과 가까운 삶 있기에…김대균의 '줄광대' 인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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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기 전 새벽녘, 줄타기 본향인 과천에서 이 시대 최고의 줄광대가 연습을 시작한다.
분홍색 부채를 한 손에 들고 줄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잰걸음으로 줄을 타더니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그러고 나서 호흡이 언제 가빴느냐는 듯이 줄 위에 앉아 완벽하게 균형을 잡는다. 세상이 밝기 전이지만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눈앞에 줄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 시간 줄광대가 보여주는 집중력은 작수목에 걸쳐진 외줄만큼이나 팽팽하고 곧다. 외줄 위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 줄과 내가 하나가 됐다는 것을 확인하면 연습은 끝난다. 인간문화재 김대균(47)은 지난 39년간 이렇게 새벽 연습을 해왔다. 김대균을 만나 그가 걸어온 특별한 길과 끝나지 않은 희망을 들어봤다. ◇ 김대균의 '외줄타기' 인생 줄타기는 줄 위에서 재주꾼이 걸어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고 재담을 하는 재주놀이다. 줄타기는 마당놀이의 꽃으로 임금 앞에서 기예를 뽐낼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줄광대의 기량을 본 외국 사신들이 '천하에 더 없는 재주'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줄타기는 현대에 들어와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됐다. 1천300년 전통 줄타기의 명맥을 잇는 예능보유자는 바로 김대균씨다. 과천 야생화자연학습장 내 훈련장에서 만난 인간문화재의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른 새벽이라고 해도 줄타기가 워낙 육체적으로 강한 힘을 요구하다 보니 5분만 줄을 타도 땀범벅이 되기 일쑤다. 줄광대의 '환갑'은 서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줄타기 명인은 '환갑'이 한참 지난 지금도 한결같이 연습을 한다. 그는 "아홉 살 때 줄을 타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줄광대로 후회 없는 시간을 보냈다. 땅 위의 세상은 평면이지만 줄 위에의 세상은 무한대의 공간이었고, 무념무상처럼 펼쳐져 있는 세상에서 날고 싶은 만큼 날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에서는 막중한 책임 속에서도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았다는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 아홉 살에 인생 전부가 된 줄타기 전북 정읍 출신인 그는 경기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스승 김영철(1920~1988, 1976년 인간문화재 등재)을 만나 줄타기를 시작했다. 그의 가족은 민속촌에서 엿 집을 운영하던 이모부의 권유로 민속촌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던 김 선생이 마당에서 뛰놀던 사내아이에게 줄을 타보게 한 것이 시작이었다. "가족이 민속촌 전시가옥에 살았는데 그때 민속촌은 저의 놀이터였어요. 학교가 파하고 나면 선생님은 줄타기 공연을 하고 형들은 풍물을 치고 누나들은 춤을 줬어요. 전통공연을 보고 듣는 것이 일상이었죠. 줄타기 입문 과정도 자연스러웠어요. 과거에는 예인 가족들이 기예를 대물림했었지만 저는 민속촌에서 까불까불 뛰어놀다가 줄타기를 자연스럽게 배웠죠." 그는 줄타기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매일같이 줄에 매달려 놀았다. 13살이던 1980년 줄타기 전수자로 선정돼 3년간 스승을 모시고 살면서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스승을 모신다는 게 힘들 법도 했지만 그에게는 '줄을 잘 타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너무 가난하니까 열심히 줄을 타면 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덕분인지 그는 1982년, 16세의 나이로 민속촌에서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방황 끝에 '판줄' 복원 1980년대는 놀이공간이 많지 않아 주말이면 많은 사람이 민속촌을 찾았다. 전속 공연을 시작한 김대균은 많은 팬을 거느린 민속촌의 스타였다. 3m 높이 공중에서 줄의 장력을 이용해 비상하는 그에게 관객의 박수가 쏟아졌다. 뒤로 뛰어올라 몸을 날려 공중회전을 하고 줄 위에 내려앉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졸였다가 철렁하게 했다가 다시 안심하게 하는 그의 연행 능력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1988년 스승의 죽음은 그에게 큰 혼란을 준다. 그는 "태산 같은 존재가 사라지고 나니 뒤늦게 사춘기가 왔다"고 설명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선생님이 돌아가시니까 세상에 던져진 고아처럼 느껴졌어요. 다른 민속예술 단체는 구성원이 많아 의논 상대가 많지만 줄타기는 저 혼자 배웠기 때문에 끌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술특기자로 군 면제 혜택을 받아놓고도 군대에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일 년 반 동안 방황이 컸죠. 그러나 습관처럼 올라갔던 서낭당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내가 줄을 안타면 줄타기는 없어진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돌아보니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다. 힘이 좋아 줄 위에서는 훨훨 날아다녔지만 줄소리와 재담 능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민속촌 공연이 끝나면 서울로 달려갔다. 이동안, 서우향 명인을 일주일에 3일씩 찾아다니며 판소리, 춤, 재담을 배웠다. 김대균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강점기에 사라진 '판줄'의 원형을 복원하게 된다. 그는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함께 삼현육각 반주에 맞춰 줄놀음을 하고 여기에 관중이 참여하는 판줄을 재현하기 위해 민속촌을 나와 무대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김대균은 2000년 스승 김영철에 이어 줄타기 인간문화재로 지정된다. 당시 나이 서른둘이었다. 줄타기 전승 계보를 잇는 '적자'이기도 했지만 줄판 원형 복원에 대한 칭찬의 의미도 있었다. 인간문화재가 된 이후에 그는 줄타기를 알리고 전승 체계를 세우는 데 더욱 집중했다. 그는 "일 년에 60회가량 공연을 치르려면 늘 긴장상태다. 컨디션과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다른 일에는 길게 집중할 수가 없어 그는 남들이 하나둘씩 가지고 있는 취미도 없다"고 말한다. 1997년 공연 중 줄이 끊어지는 사고를 당한 이후에는 현장 기록 정리에 들어갔다.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고, 안동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 줄광대가 최고의 대접 받는 시대 꿈꾼다 무형문화재는 사람이 없으면 전승이 불가능하다. 현재 줄타기보존회의 전수생은 8명이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 흥미가 생겨 보존회에서 교육을 받고 전수생이 됐다. 자신은 24시간을 스승과 함께하며 도제 교육을 받았지만, 제자에게는 억지로 교육을 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열심히 했으면'하는 바람은 포기할 수가 없단다. "제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이런 말을 많이 해요. '절대 100가지고는 하늘을 감동 못 시킨다. 줄 위에서는 120을 다하고 몸을 던져야 100이 될까 말까다. 100을 준비해서 100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천만 명 중에 한두 명 정도다.' 무슨 일이든 120, 150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운살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는 줄타기를 사랑하는 아이들을 더 찾고 싶다고 했다. 자신에게 민속촌이 놀이터였듯이 과천에 있는 전승교육관이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단다. 그렇게 전통문화를 체험하다 보면 그중에서 줄타기를 사랑하는 아이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줄타기는 한국에만 있는 기예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줄타기가 줄 위에서의 '묘기'에 중점을 둔다면 한국의 줄타기는 '놀음'이 주(主)라는 차이가 있다. 줄 위에서 재담과 노래, 춤, 기예를 묶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관객과 함께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식의 줄타기는 한국에만 있다. 유네스코도 2011년 우리 줄타기의 이 같은 예술성을 인정해 세계적으로 보호하고 전승할 가치가 있는 '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인간문화재 김대균의 어깨는 무겁다. 그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전통 줄타기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예술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제자들이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활발하게 공연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제자들이 날 수 있도록 제가 디딤돌이 될 겁니다. 아이들 세대에서는 줄광대가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줄판에서 겪었던 아픔과 설움은 제 선에서 끝내야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공연료로 10만 달러를 받는데 왜 우리는 10만 달러를 못 받을까요. 저는 줄타기도 그런 대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세대에 가서는 꼭 그래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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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날 : [15-10-13 10:46] | 신문관리자기자[news2466@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