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재 앞둔 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세계유산 등재 유력한 부여의 백제 유적
부여, 공주, 익산에 있는 백제의 유적이 이번 주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확실시된다. 이로써 삼국시대의 유적은 모두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한반도 남서부에 터를 잡은 백제는 융성한 문화를 일궜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졌다. 찬란했던 도시는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고, 왕과 백성은 대륙으로 끌려갔다.

안타깝게도 소멸한 왕국의 문물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지만, 최후의 수도였던 부여에는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 남아 있다.

◇ 낙화암에 얽힌 진실은 무엇일까

역사는 살아남은 이의 기록이다. 무릇 승리자는 미화되고, 패배자는 비하된다. 삼국시대를 통일한 신라는 주인공이 됐지만, 백제와 고구려는 조연으로 전락했다.

특히 백제의 패멸을 지켜봐야 했던 의자왕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실(史實)과는 관계없이 '향락과 여자에 빠진 군왕', '삼천궁녀를 거느린 왕'으로 회자됐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의자왕은 자격 미달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는 대목이 있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동양의 오성(五聖)으로 꼽히는 학자다. 중국의 성현에 비유될 정도면, 인품과 학식이 훌륭했다고 봐야 합당하다.

무왕의 장자로 641년 권좌에 오른 의자왕은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을 풀어줬고, 신라를 공격해 40여 개의 성을 일거에 장악했다.

그러나 치세 15년 즈음이 되자 변화가 일어났다. 정확한 원인은 짐작할 수 없으나 사치와 주색에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에 알려진 의자왕의 모습이 이때 나타났다. 충신들이 간언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의자왕 20년인 660년 7월 당나라군 13만 명과 신라군 5만 명이 합세해 들어오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투항했다. 그는 부여에서 공주로 피신했다가 당의 도읍으로 압송됐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사서의 어디에도 의자왕이 부소산성의 낙화암에서 삼천궁녀를 데리고 뛰어내렸다는 내용은 없다. 실상은 낙화암이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는 고려시대에 '떨어져 죽은 암석'이라는 뜻의 타사암(墮死巖)으로 일컬어졌고, 고려 후기에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에 의해 처음으로 낙화암으로 명명됐다.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사연도 완전한 허구다. 조선시대의 문신인 김흔이 낙화암을 소재로 남긴 시에 '삼천궁녀'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다. 삼천은 궁녀가 많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수식어였을 뿐이다.

◇ 부소산성, 왕궁 뒤편에 마련된 도피처

백제의 수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남진했다. 처음에는 한강 유역의 위례가 본거지였으나, 왕실은 5세기 후반에 오늘날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웅진은 긴급하게 선택된 탓에 입지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성왕은 538년 사비로 다시 한 번 도성을 옮겼다. 사비는 백마강이 삼면을 에두르고, 북쪽에 부소산이 있어서 적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용이했다.

사비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부소산은 최고 높이가 106m로 산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낮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야산이다.

백제는 사비로 이도(移都)를 하기 전부터 부소산에 성을 축조했다. 성의 형태는 흙을 한 층씩 다져 올리는 판축식 토성이었다. 공주의 공산성 역시 삼국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훗날 석성으로 바뀌었다.

비록 나당 연합군의 진격에 맥없이 물러났지만, 사비는 겹겹이 성으로 둘러싸인 요새와 같았다. 백제는 강이 흐르지 않는 동쪽에 외성에 해당되는 나성(羅城)을 만들었고, 그 바깥에는 청마산성과 석성산성을 건설했다.

또 백마강 건너편의 북쪽과 남쪽에는 증산성과 가림성을 조성했다. 부소산성은 세 겹의 동심원에서 중심이 되는 원이었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관북리 유적의 뒤쪽에 위치한다. 궁궐은 없어졌지만, 토성은 일부 남아 있다.

부소산성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잇는 포곡식과 산꼭대기에 머리띠처럼 쌓는 테뫼식이 혼재돼 있는데, 동그라미 안에 알파벳 T자가 들어간 모양새를 띠고 있다.

백제 때 넓은 원형의 포곡식 산성을 만들었고, 후대인 통일신라시대에 T자 형태의 테뫼식 산성을 추가한 것으로 미뤄진다. 그러나 현재 두 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백제 때 쌓은 토성은 삼충사 옆에 난 계단을 오르면 확인할 수 있다. 눈앞을 가로막는 꽤나 가파른 경사지가 바로 산성이다.

1980∼1990년대의 조사를 통해 산성의 윤곽과 성문이 있던 자리가 파악됐는데, 삼충사의 배후에는 남문이 있었다고 한다. 산성은 봉긋 솟아 있어서 눈에 띄지만, 별다른 표식이 없어서 등산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제의 인물인 성충, 흥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삼충사는 부소산성 답사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당한 곳이다. 당내에는 제단 위에 세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세 충신은 국운이 사그라지는 가운데도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왕궁이나 정림사지와 마찬가지로 부소산성에는 백제의 건물이 없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눈길을 끄는 목조 정자가 있다.

그중 삼충사와 가까운 영일루는 '해를 맞이하는 누대'라는 의미의 영일대가 있던 곳에 지어졌다. 본래는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홍산면의 관아에 있던 문을 이전해 지었으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단청의 색이 바랜 탓인지 분위기가 고풍스럽다.

영일루에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군창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부대의 군량미 창고가 있던 터로 백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묻혀 있다. 그동안의 발굴 작업을 통해서는 쌀과 보리, 콩 등의 낟알은 물론 토기와 사기의 파편, 수막새 등이 발견됐다.

움집 형태의 막사가 있던 수혈 병영지를 거쳐 오르막을 거닐면 또 다른 정자인 사자루를 만난다. 부소산의 정상에 세워진 사자루의 옛 명칭은 송월대다. 영일루가 해맞이를 하는 장소였다면, 사자루는 달빛을 관조하는 곳이었다.

부여의 상징적 명소인 낙화암은 부소산성의 바깥에 위치한다. 바위 위에는 궁녀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29년 지어진 백화정(百花亭)이 있다. 삼천궁녀의 설화가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육각 정자에서 굽어보는 풍치는 사뭇 쓸쓸하다.

부소산성에서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고란사다. 낙화암에서 생을 마친 백제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창건됐다는 사찰이다.

고란사를 둘러본 뒤에는 걸어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부소산성 서문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상에서는 송시열이 낙화암에 쓴 글씨를 볼 수 있다.

◇ 온전히 보존된 백제 유일의 석탑

부여의 옛 이름은 사비다. 사비도성의 중앙부에는 불교 사찰이 있었다. 백제는 4세기에 불교를 받아들인 뒤 세간에 널리 장려했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었다.

이 절에도 전각과 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백제가 패퇴하면서 전당은 소실됐고, 돌로 쌓은 탑만 존속했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이다.

높이가 8.8m에 이르는 석탑은 기단부와 지붕돌의 윗부분만 하얗고, 지붕돌의 아래쪽과 몸돌은 다소 거뭇하게 얼룩져 있다. 주변 건물이 타면서 생긴 연기와 그을음 때문이다.

완공된 이후 한 번도 해체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다. 비례와 대칭 구조도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다. 석재를 하나하나 다듬고 끼워 맞춘 기술과 공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 고분군

삼국시대의 고분 가운데 주인이 명확히 밝혀진 곳은 무령왕릉뿐이다. 구릉 위에 있는 백제 무덤 7기를 지칭하는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도 피장자가 오리무중이다. 다만 백제의 왕이나 왕족이 묻혔을 것으로만 추정된다.

가장 아래쪽의 중간에 있는 중하총(中下塚)은 무령왕릉처럼 내부의 천장이 아치형이어서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이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나머지 무덤들은 천장이 네모반듯하거나 육각형을 이루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의 모든 무덤은 폐쇄돼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한편에 백제 문화와 고분에 대한 자료가 정리된 자그마한 전시관이 있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또 전시관 외부에는 중하총의 오른쪽에 있는 동하총(東下塚)이 실물 크기로 복제돼 있다. 이 무덤의 벽에는 사신도, 덮개돌에는 연꽃과 구름 그림이 있다.

한편 고분군 전시관 옆에는 능산리 절터가 있다. 1993년 백제 최고의 유산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곳이다.

정교함과 우아함이 돋보이는 보물은 절터의 진흙 구덩이에 숨어 있었다. 전시관에는 모조품이 있고,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마주할 수 있다.

백제 문화의 정수를 느끼려면 반드시 진품을 봐야 한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출현한 향로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빛깔이 오묘하고 장식이 섬세하다.

글쓴날 : [15-06-29 13:02] 신문관리자기자[news24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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